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요토미 히데요리 (문단 편집) === 출생과 아버지의 죽음 === 1593년 부친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의 나이 57세 때 [[오사카 성]]에서 탄생하였다. 어머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로 [[아자이 나가마사]]의 아내였고 [[오다 노부나가]]의 여동생인 [[오이치|이치]]의 장녀 [[요도도노|차차]]이다. 유모는 구나이쿄노 쓰보네(宮内卿局,? ~ 1615), 우쿄다이부노 쓰보네(右京大夫局, ? ~ 1615)이다. 늘그막에 겨우 얻은 큰아들인 [[도요토미 츠루마츠]]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 후 히데요시는 더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여겼는지 누나 닛슈의 아들인 조카 [[도요토미 히데츠구]]를 [[후계자]]로 지명했으나 작은아들인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히데츠구는 [[낙동강 오리알]] 신세가 되었다. 태어났을 당시 이미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[[간파쿠]] 자리를 이어받고 있었으므로 [[논란]]이 제기되었다. 히데요리의 생후 2개월째인 1593년 10월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딸과 아들 히데요리의 [[약혼]]을 주선하는 등 히데츠구를 회유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, 1595년 7월 히데츠구로부터 간파쿠 직책을 박탈해 [[할복]]시킨 뒤 그의 일가족 또한 [[숙청]]하였으며 다수의 [[다이묘]]들로부터 히데요리에게 [[충성]]을 다짐하는 혈판 서약서를 쓸 것을 강요하여 히데요리의 후계자 [[지위]]를 확립시켰다. 이후 후시미 성[*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 있는 성]이 완공되어 부자가 함께 거처를 옮겼으며 [[양자(가족)|양자]]였던 처남의 아들인 [[코바야카와 히데아키]]는 코바야카와의 양자가 되었고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의 아들인 [[유키 히데야스]]도 히데요시의 양자였다가 유키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. 예외적으로 [[우키타 히데이에]]는 여전히 도요토미 성씨를 유지했다. 1596년 9월 [[성인식]]을 치른 뒤 히데요리(秀頼)로 [[개명]]하였다. 이후 히데요시는 그 때까지 [[독재]]에 가까웠던 자신의 [[정권]] 체제를 수정해 [[오대로|고다이로]](五大老), [[오봉행|고부교]](五奉行) 제도를 도입하여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였다.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[[센히메]](千姫)와 약혼시키는데 센히메와 히데요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서 그런지 [[부부]]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. 그러나 히데요리가 겨우 5살이었던 1598년 9월에 히데요시가 [[사망]]하게 된다. 히데요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거처 또한 오사카 성으로 옮겼다.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고다이로의 일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신 합의제의 원칙을 자주 어기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갈등이 증폭되었다. 이후 또다른 고다이로인 [[마에다 도시이에]]가 사망하고 고부교이자 친 도요토미파인 [[이시다 미츠나리]]가 실각하면서 도요토미 정권은 흔들리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린 히데요리를 제치고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